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바르바로사 작전 (문단 편집) === 소련군 === 소련군은 1938년에 벌어진 [[대숙청]]에서 사단급 이상의 단위 부대에서 반이 넘는 군 지휘관들이 처형되거나 [[굴라크]]로 끌려가는 큰 혼란을 겪었다. 대숙청이 적어도 [[겨울전쟁]]과 동부전선 초반까지 큰 혼란을 야기했음은 부정할 수 없다. 최근 들어 대숙청에서 날아간 인물들 중에 상당수가 정치적으로 출세한 무능한 사람들 또는 현대전에 적응하지 못한 사람들이었고, 이들이 사라진 후 전문적이고 현대적인 교육을 받았던 유능한 40대 지휘관들이 전면에 나설 기회를 제공해서 결과적으로 도움이 되었다는 반론을 감안해도 그렇다. 초반의 대패 때문에 소련군이 전혀 준비를 하지 않은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 소련은 1920년대부터 강력한 국방 정책을 밀어붙였다. 특히 1930년대 성공한 공업화 때문에 '''전투기 수, [[잠수함]] 수, 전차 수는 1940년 당시 세계 1위'''였다. 이렇게 많은 장비를 보유하고 있었고 그 운용 교리 또한 발전시키고 있었으나, 군부에 대한 대숙청의 결과 이런 교리를 발달시킨 장성들도 쓸려나가면서 교리들이 부정되었으며 그 이후로도 이론가들이 자주 숙청되었다. 그러다 보니 계속 운용 사상이 바뀌는 바람에 부대들은 해체와 재편을 반복하고 있었다. 보유한 전차와 항공기들은 스펙상 독일군 장비들을 상대로 우위를 가질 수 있거나 그보다 조금 떨어지는 전간기 시대에 맞춰 발전된 장비들을 갖고 있었지만 결과적으론 적시에 활용되지 못하고 바르바로사 작전 초기에 독일군에 의해 격파되었다. 히틀러가 본격적으로 침략적인 의도를 내비치는 1939년부터 1941년까지 소련군은 병력을 2배로 늘렸으나, 갑자기 몸집이 커지자 대숙청에서 기인한 부작용과 함께 장교 부족이라는 큰 문제가 벌어졌다. 상급 장교도 부족했지만, 하급 장교는 절망적이었으며, 이 때문에 소련에서는 [[대학생]]들에게 속성으로 몇 주 교육을 시킨 다음에 바로 [[소위]] 계급을 달아주는 식으로 장교를 양성하였다. 1938년에 끝난 [[스페인 내전]]에서의 전훈[* 스페인의 산악 지형에서 전차는 무용지물이었고 스페인 내전에 참전했던 장교들의 보고, 기갑을 중요시했던 투하쳅스키의 숙청으로 이렇게 멍청한 병크를 저질렀다.]으로 전차 부대들을 모두 여단급 이하로 축소재편했다가 1940년 독일군의 [[전격전]]의 대성공을 보고 다시 군단급으로 재편하기로 했다. 이 와중에서 독일군의 침략을 받았으니 결과는 뻔한 일이다. 공군에도 숙청의 올가미가 덮쳐서 유능한 지휘관 상당수가 "항공사고가 너무 잦은데 이거 사보타지 아냐?" 라는 [[NKVD]]의 의심을 받아 처형되었다. 결과적으로 공군도 몇 년간 발전이 지체되었다. 사실 항공산업의 초창기에는 소련뿐만 아니라 다른나라에서도 상당히 많은 사고가 났고, 이는 소련만의 문제는 아니었으나, 항공기 문외한인 NKVD는 이를 반동들의 사보타지라고 생각, 저명한 항공공학자들을 수용소로 보내서[* 저명한 항공공학자였던 폴리카프포프, 투폴레프, 먀시쇼프, 코롤료프 등은 수용소나 감방에서 몇년 복역을 했다.] 삽질을 하게 만들었다. 이런 사정에서 항공공학의 선도국중 하나였던 소련은 미국, 독일, 영국에 비해 몇년 뒤쳐지게 되었다.[* 당시 학문적 영역에서의 항공공학은 독일이 가장 앞서나가고 있었지만, 생산공학은 대량생산 체제를 갖춘 미국이 앞서나갔다.] 예외적으로 소련군이 [[핀란드군]]을 상대로 고전을 하다가 겨우 승리한 1939-40년의 [[겨울전쟁]] 때의 교훈은 헛되지 않아서, 소련군의 이후 월동 장비나 동계 작전 능력이 대폭 향상되었다. 후에 겨울에 발생한 [[모스크바 전투]] 때 겨울전쟁에서 붉은 군대 병사의 피값으로 체득한 전훈들은 유용하게 사용되어 소련군은 겨울에 대한 대비를 제대로 하지 않고 있었던 독일군을 물리칠 수 있었다. 뿐만 아니라 이때 승진한 [[키릴 메레츠코프]]나 [[알렉산드르 노비코프]]는 후에 소련군의 중추가 되었고 [[국방장관]]이 된 [[세묜 티모셴코]]는 군 개혁을 조용히 이끌었다.[* 냉전 당시 독소전 초반 소련군 참패의 원흉으로 간주되던 보로실로프는 러시아의 자료가 풀리면서 재평가를 받고 있다. 물론 그는 야전지휘관으로서는 무능했고, 이는 [[겨울전쟁]]과 [[레닌그라드 공방전]]에서 여실히 드러냈지만, 스탈린과의 친분으로 군과 정치권을 연결하는 통로역할을 하면서, 나름 붉은군대의 기계화를 소련의 경제가 감당하는 내에서 착실히 이끌었다. 보로실로프는 기계화를 주창한 투하체프스키와 앙숙이었고, 투하체프스키를 숙청하는데 큰 역할을 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군의 기계화가 필요하다는 전제는 공감하고 있었고, 소련의 경제가 감당하는 내에서 착실히 기계화를 이끌었다. 그리하여 BT 시리즈나 T-34, KV 시리즈 모두 그가 국방장관 재임시에 개발이 시작된 것이다.] 게다가 소련군은 [[러시아 내전]] 이후 [[겨울전쟁]] 때까지 대규모 실전 경험이 거의 없었다. 실전경험의 부재는 1차 대전 이후 다른 나라도 유사했지만, 소련군이 독일군에 비해 이런 점에서 결정적으로 불리했던 점은 1차 대전에 대대장 이상급으로 참전한 고급 지휘관들이 거의 없었다는 점이다. 제1차 세계 대전 참전 러시아 고급장교 대부분은 귀족이나 반혁명세력 출신이 많았기 때문에 붉은 군대에 가담한 고급장교 수는 극히 적었고, 기본적으로 붉은 군대 장성급 고급장교들은 부사관이나 사병으로 제1차 세계 대전에 참전한 사람들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실전에서의 지휘 경험이 적다는 문제가 있었다.[* [[스페인 내전]]에 참전하여 풍부한 실전 경험을 쌓았던 장성들은 있었으나 이 전쟁은 기본적으로 내전 성격을 띠었던 데다가 산악 지형에서 치뤄진 보병간의 회전이었던 만큼 여기서 쌓은 군사 지식, 병법이 대평원이었던 소련에 적용될 수 없었다. 독일군의 원수-상급대장들이 제1차 세계 대전시 대위급 이상이었기 때문에 풍부한 지휘경험을 가지고 있었던 것과 대조된다.] 작정하고 대규모로 전면전을 벌이는 데는 교리, 즉 종심 작전 이론이라는 선진적인 교리가 [[미하일 투하쳅스키]] 등의 선구적인 이론가들에 의해 확립되어 있었으나 이 이론을 개발한 이는 물론이고 스페인에서 그나마 실전 경험을 쌓았던 인물들도 대숙청으로 상당수가 저승으로 갔다. 특히 [[할힌골 전투]]에서 [[일본군]]과 싸워 본 공군 참전자들이 숙청된 결과 소련 공군은 초기에 엄청난 손실을 입게 된다. [[미하일 투하쳅스키]]같이 기동전의 개념을 제안한 유능한 장성들까지 처형되었던 데다가 이론까지 폐기되어서 나머지 사람들은 숙청될까 봐 투하쳅스키의 '투'자도 못 꺼냈다. 투하쳅스키가 제시한 [[기동전]]은 독소전쟁 도중 소련에서 다시 부활하였다는 점만 보더라도 대숙청이 도움이 되었다는 주장은 설득력이 없다. 그래도 납득이 안 된다면 독소전쟁의 영웅인 '''[[게오르기 주코프]]조차도 대숙청 와중에 저승 갈 뻔했다.''' 다행히 [[할힌골 전투|전공을 세워서]] 칼날을 피했지만. 지시 없이 훈련했다고 장교나 장성이 저승 가는 이런 미친 피바람 속에서 안 그래도 훈련 부족인 소련군은 더욱 더 경직되어 갔고 새로운 아이디어나 군사 교리 또한 답보 상태였고 그 대가로 2,900만 명[* 4,000만 명 이상으로 보는 견해도 있다.] 이상의 사망자를 감수하게 되었다. 이 수치는 민간인 사망자를 포함한 것으로 나치의 인종 청소로 인해서 엄청난 민간인 사망자가 발생했다. 군인 총 사망자는 1,000만 명 정도로 추산되며 360만 명 정도의 포로 사망자를 포함한 수치이다. 바르바로사 작전 기간 동안 전사자는 400만 명이 넘어가며 [[전차]]와 [[전투기]]의 손실은 각각 20,500대와 21,200대에 이를 정도로 엄청난 것이었다. [[우크라이나]] [[오데사]] 방어전 당시에는 쓸 전차조차 없어서 [[NI 전차]]라는 민간 [[트랙터]]를 되는 대로 엉망진창으로 개조한 [[테크니컬]] 경전차를 주력 기갑으로 내세워 쓸 지경이었다. 첨언하자면 이때 소련이 날려먹은 항공기의 수는 독소전 전 기간 동안 소련이 날려먹은 항공기의 40% 정도 된다고 한다. 포병의 피해도 극심해서 소련군은 바르바로사 작전에서 중포병이 거의 삭제당했다. 소련이 [[독소전쟁]]에서 이겨내는 데 활약을 한 소위 40대 지휘관들도 전쟁 초기엔 감각이 없기는 마찬가지라서 주코프마저도 독소전쟁 초기엔 수십만 명의 병력을 날려먹는 등. 소련군은 계속 얻어터지면서 독일군 교리를 학습하여 이를 극복해 나간 것이다. 훗날 소련군의 명장에 드는 [[콘스탄틴 로코솝스키]], [[이반 코네프]], 안드레이 예료멘코 등도 개전 초기에는 실전 경험 부족 때문에 계속 참패했고, 후퇴에 급급한 모습을 보였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원래 [[연대장]]이나 [[여단장]]급 인물들이 [[군단장]]이나 [[사단장]]을 맡고 있었으니... 다만 이 당시의 독일군은 2년간 계속 [[폴란드 침공|폴란드]], [[노르웨이 침공|노르웨이]], [[프랑스 침공|프랑스]], [[영국 본토 항공전|영국]], [[유고슬라비아 침공|유고]], [[크레타 섬 전투|그리스군]] 등을 상대로 실전을 치러 봐서 수준 높은 경지에 올랐다는 것을 감안하면 소련군이 졸전을 벌였다기보다는 독일군이 잘 싸웠다고 보는 게 더 맞는 것 같다. 다시 말해 당시 독일군은 규모, 전술에 있어서 최강이었던 것이다. 좀 더 직접적인 원인을 꼽자면 바르바로사 작전은 [[독소 불가침조약]]을 갑작스럽게 파기하고 기습을 감행한 공격이었다는 점을 들 수 있다. [[진주만 공습]]에서도 알 수 있듯이 아무리 전력이 강하다 할지라도 갑작스럽게 기습 공격을 당하면 엄청난 피해를 일방적으로 얻어 맞을 수밖에 없다. 특히나 독일과 소련은 '''불가침조약'''을 맺고 있던 상황이었기에 독일은 독소전 초기 일본이 진주만 공격으로 큰 이익을 얻었던 것처럼 어마어마한 전과를 얻을 수 있었다. 게다가 진주만에서는 산업 시설 등은 건드리지 못했는데 이건 산업 시설과 곡창지대까지 날려버렸다. 갑작스런 기습이 아니었다면 독소전쟁 초기 [[교환비]]가 20대 1에 달하는 참패는 나오지 않았을 것이다. 이 와중에 소련에서 스탈린을 대신할 지도자는 없었다. 스탈린은 서구 국가들과 협상을 잘 이끌어 냈으며, 소련이 분열되지 않고 통합된 지휘와 통제를 받도록 했다. 스탈린은 여러 가지 이유 때문에 거의 있을 필요가 없었던 인물로 표현되는데, 대숙청과 초반 무리수를 포함하더라도 독소전쟁에 대한 공로를 완전히 부인하기는 어렵다. 전선에서의 싸움뿐만 아니라, 후방에서 소련 인민을 통제하며 무기를 생산하고 병력을 동원하며 자원을 움직이는 것도 중요하다. 소련 인민들의 자발적인 희생이 있었다고 한들 그것이 중앙의 효율적 통제 아래 수행되지 않았다면 그런 효과를 내는 것은 불가능했을 것이다. 바르바로사 작전 이후 1942년부터 스탈린의 [[스타프카]]는 소련 전체에 대한 완전한 통제를 행사했다. 전선에 관여하면서 스탈린이 벌인 실책은 커다란 것이지만, 그래도 [[니키타 흐루쇼프]]가 '''스탈린이 있었음에도 이긴 것'''이라고 말한 것은 지나친 비약이다.[* 헨리 키신저는 저서에서 "'스탈린과 히틀러는 모두 중대한 판단 실수를 저질렀으나 스탈린은 그것을 만회할 능력이 있었고 히틀러는 아니었다.'" 라고 평했다.][* 흐루쇼프는 우상과 신격화에 반대하며 스탈린 체제를 붕괴시키기 위해 스탈린을 비난한 것이다. 이건 사학적 연구의 결과물이 아니고 정치적 공격이다.] 스탈린은 분명 실책[* 크게 보면 첫째는 유능한 인력들을 숙청하여 군대의 질을 저하시킨 것, 둘째는 독일의 침공과 관련된 정보를 받음에도 이를 무시한 것이다.]이 있었지만 그의 잘못을 깨닫고 후방에서의 지원에 힘썼고 소련의 지휘관들은 그 지원을 받으며 독일군을 격퇴했다. 물론 스탈린이 모든 것을 총괄했고, 스탈린이 2차 대전을 혼자서 이끌었다 하는 수준까진 아니지만 말이다.[* 그걸 하려던 히틀러는 결국 독일을 파국으로 이끌게 된다.] [[독소 불가침조약]] 때문에 방어선 구축에서도 문제가 생겼는데, 원래 국경에서 10년 동안 준비해 놓은 방어선을 버리고 새로운 국경선에 맞춰서 방어선 구축을 처음부터 다시 진행해야 했던 것이다. 또한 스탈린은 독일이 영국을 완전히 정리할 때까지는 시간이 있을 것으로 보았으므로 침략의 구실을 주지 않기 위해 독일군이 국경을 넘나들며 정찰하는 것마저 무시하도록 명령했는데, 가뜩이나 어설픈 방어선이 독일군에게 완전히 분석당하면서 초반에 엄청난 피해를 입게 된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